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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 연재 2회

이신칭의의 원리: 그리스도와의 연합

본문

로마서 5장 12-21절

· 개역개정

설교

김치훈목사 · 2026년 10월 11일 · 새부대교회

이신칭의의 원리:그리스도와의 연합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이신칭의의 원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복된 소식에 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만드신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원리가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칭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되지 않고, 세상에서 성공한다고 의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되는 이 귀한 진리를 바울사도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는 이신칭의의 열매에 대해서, 하나님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으면, 어떤 열매가 있는가? 먼저는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고 즐거워합니다. 또한 환난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안에 부어져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은혜를 줍니다.

그리고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이 된다는 이 위대한 은혜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냥 믿었다고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신다는 게 말이 되는가? 너무 쉽기도한데, 그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의문에 대해서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21절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일단 내용파악이 수월하려면, 13절을 빼고 읽는게 낫습니다.

14절을 빼고 읽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해서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서 은혜와 생명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문장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12절의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가 해석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므로’는 앞에 원인 뒤에 결과를 이끄는 접속사입니다. 그런데 내용은 1-11절은 이신칭의의 열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부어짐으로 인해서 소망을 품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부터는 어떻게 이신칭의의 은혜 그게 가능한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에가 결론이고 뒤에가 원인이 내용적으로는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는 앞에 원인이 나오죠 그리고 뒤에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니 헷갈립니다. 그러면, 헬라어 원어에는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기록되어있는 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διὰ τοῦτο (디아 투토)

디아는 –때문에입니다. 투토는 이것 이라는 지시대명사이구요.

“이것 때문에” 라는 뜻이됩니다.

그럼 “이것”은 앞에 내용을 받는가? 뒤에 따라오는 내용을 받는가?

앞에 내용을 받습니다. 뒤에 내용을 받으려면 다른 접속사들이 더 있어야 하는데 본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앞에 이신칭의의 열매들의 내용을 받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라는 의미죠.

앞에 내용이 원인이 되는거에요. 그러면 구조적으로는 그러므로가 들아가는게 맞죠. 앞에 내용이 원인이고 뒤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결론이 됩니다. 그런데 왜 문맥이 이상하게 느껴지는가?

그런데 여기서 뉘앙스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그러므로” 라고 하면,

원인과 결과, 정리하고 결론을 내리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니까, 결론내리고 정리해요. 그러므로, 이렇다.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은 앞에 있는 내용을 요약하든지, 앞에 있는 두 내용을 정리해서 어떤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여기서 그러므로는 앞에 있는 두 문장을 정리하고 결론을 내렸죠.

그러니까 그러므로를 쓰는 문장에서는 앞에 언급한 내용들을 요약 및 정리하는 방식으로 마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서는 그냥 결론을 내린게 아니라, 앞에 내용을 근거로 해서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제로 해석을 더 정확하게 하자면,

‘그러므로’ 보다는 ‘이런 까닭에’ 그렇다면, 한 사람으로 사망이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생명이 들어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라고 그 원리를 보충설명하고 있는 방식인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죄가 들어와 사망이 역사했지만,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왕노릇한 것입니다. 라고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믿는 이들이 모두 의로워지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고 합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신칭의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담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아담의 경우와 대조하는 것입니다.

12절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여기서 한 사람은 아담을 가리키고 있죠.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사건을 말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죄라고 들었을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가 유전되어서 사람에게 흘러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선악과 먹은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원죄의 죄값을 받아야 되느냐? 하는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실제로 나는 선악과 안 먹었잖아요.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했습니다.

이 의미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같이 자신의 의지로 행동을 해서 죄를 지었다면, 그런 방식으로 나도 죄를 지었고, 그로인해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아기들의 경우에는 아직 사리분별이 안되서 의도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는 때가 있는데 그 때 죽는 아기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들은 아직 아담과 같이 죄를 지은 게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이와같이를 해석할 때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또한, 14절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도 사망이 왕노릇했다고 기록되어있죠. 그래서 12절의 이와같이를 아담과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지은 경우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절은 무슨 뜻인가?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으로 죄가 들어오고 그로 인해서 사망이 들어왔다.

이와같이 이 부분도 헬라어 원어로 보면

헬라어 원문을 보면,

“카이 후토스”

‘카이’는 ‘그리고’라는 접속사입니다.

‘후토스’는 ‘이런 식으로’, ‘이런 경로를 따라서’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이와같이를 아담이 한 행동과 같이 라고 해석하면 안되고, 아담의 그 죄로 인해서 세상에 사망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경로를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다 라는 의미가 됩니다. 곧 아담의 죄로 인해서 사람안에 죄성이 생기고, 그 죄성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한 평생 종노릇하는 인생이 되어버렸고, 세상이 타락하게 된 죄와 사망으로 구조적으로 타락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구조적인 타락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고의적으로 죄를 지은 이들이나 모르고 죄를 지은 이들이다. 모두 범죄하게 되었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이 지은 죄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해서 나도 죄를 짓게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18절에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처럼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이 정죄를 받게 되는 것이나,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데는 같은 전제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 원리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대표성의 원리로 설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표성의 원리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려고 했을 분이죠. 대표가 죄를 지었으니까 거기에 속한 자들이 다 죄를 지은 것이 되어버렸고, 새 인류의 대표이신 예수님이 의를 행하셨기 때문에 그 속에 속한 자들이 다 의를 행한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현대를 사는 이들이 자신들의 문화에서 이해하려고 대표성의 원리라는 틀로 붙인 것이지 실제로 성경이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한 사람을 통해서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이런 개념은 대표성의 원리로 성경에 나온 것이 없습니다. 이 원리는 성경안에서 전제된 어떤 원리를 전제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성경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히브리서 7장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 본문은 아브람이 멜기세덱을 만나서, 십일조를 받친 창세기 14장의 내용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론의 자손 대제사장보다 높은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브람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받쳤다고 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레위보다 높은 분이죠. 레위의 아버지가 야곱, 야곱의 할아버지가 아브람이니까. 레위보다 높은 분인 아브람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받쳤으니 레위의 자손 중에 있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들은 당연히 멜기세덱보다 낮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대제사장들의 아버지격인 레위도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레위는 멜기세덱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백성들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 곧 제사장들도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받쳤다는 것입니다. 레위를 비롯해서 어떤 대제사장도 멜기세덱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십일조를 받칩니까?

그런데 성경에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십일조를 바쳤다고 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참여신학”이라고 합니다. 레위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한 행동에 레위도 참여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소속의 개념이고 다스림의 개념 곧 왕노릇한다는 개념입니다. 아브람의 순종이 아브람에게 속한 모든 후손들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곧 후손들도 아브람과 함께 그 행동을 한 것으로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악이 아담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아담의 죄를 함께 지은 것으로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에 참여된 것입니다. 억울할 수 있지만, 이 참여의 원리는 만유인력과 같이 일반적인 질서입니다.

과거에 조상이 벼슬을 하면, 그 집안은 다 그 벼슬한 집안입니다. 그 자녀들도 그 벼슬을 한 사람처럼 대우를 받습니다. 그 조상의 일에 참여한 자처럼, 반대로 그렇습니다. 조상이 반역죄에 가담했으면 그 조상에게 속한 모든 이들이 다 반역죄를 가담한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참여가 된 것입니다. 참여의 원리는 인류에게 이미 작동하는 원리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그 원리에 어색함을 느끼는 것은 현대사회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그런 세계관에서는 내가 세상의 어떤 연결망에서 분리되어있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참여되어 있고, 조상들과, 형제들과 다 연결되고 연합되고 참여되어 있습니다. 누구와 연합되어있고, 어디에 참여되어 있는 지에 따라서 우리의 삶과 인생은 크게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혈통적으로 아담에게 속해있고, 아담에게 참여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아담이 죄를 지었고 그 죄가 들어왔고, 죄로 인해서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아담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죄에 참여했고 그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원리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보좌우편에 앉으신 모든 예수님의 순종과 역사는 그를 믿는 자가 함께 누립니다. 아담은 혈통적으로 아담안에 있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믿음으로 예수님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믿음안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난 십자가를 본 적도 없는데 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이해도 안되고 설명도 안되죠. 그것이 바로 참여의 원리로 설명이 됩니다. 연합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게 되고, 예수님안에 있고, 예수님께 소속이 되고,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일에 참여한 자가 된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내가 누구의 통치아래 있는가? 곧 누가 나에게 왕노릇하시는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왜?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거했고, 예수님의 통치아래 있고 예수님의 일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이 참여의 원리, 참여의 신학을 전제로,

이신칭의의 열매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해서 사망이 들어와서 왕노릇했지만

한 사람의 의로운 순종으로 인해서 생명안에서 왕노릇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참여의 원리를 따라서, 참여신학으로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의 수준은 하나님아버지와 예수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화평의 정도입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이 나의 의를 근거로 하지 않고 예수님의 의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나는 그 화평에 참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정도도 역시 예수님의 의에 참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그 사랑에 참여하였습니다.

내게 누리는 하나님의 화평,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소망등 모든 하나님의 은혜들은 예수님께 속해있는 바로 그 정도의 수준으로 내가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여신학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 함께 일으키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앉히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믿으면 예수님의 일에 참여한 것으로 인정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내 모든 죄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내가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주께서 부활하실 때나도 부활한 것입니다. 의에 대해서 부활했습니다. 할렐루야, 나도 주와 함께 부활했습니다. 그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함께 앉아서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고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한다.

그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이 내게 나타납니다. 왜? 나도 믿음으로 주님의 부활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내게도 그 고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왜요 나도 믿음으로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